정내영 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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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팔조리 산136-1
탐방로그
경주시 감포읍 팔조리 산136-1에 위치한 정내영 선생 구 묘비를 찾았다. 정내영 선생의 묘는 현충원으로 이장한 후 묘비를 며느님의 묘소 옆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대전현충원으로 이전하기 전의 묘소는 경주시 감포읍 팔조리 산 195 대흥사 뒤 소랑산에 있었다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인 진주하씨 금화 지묘 양좌
현충원으로 이장한 후에 정내영 선생 묘비를 며느님의 묘소 옆으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한다.
대전현충원으로 이전하기 전의 묘소는 경주시 감포읍 팔조리 산 195 대흥사 뒤 소랑산에 있었다고 한다.
GPS 상의 주소는 감포읍 팔조리 산 136-1 생가 마을 입구이다.
義士 竹橋 迎日鄭公 騋永 之墓(의사 죽교 연일정공 내영 지묘)
慶州(경주) 治東(치동) 八助居(팔조거) 鄭斯文(정사문) 順永(순영)은 余素深友人也(여소심우인야)라. 當爲我語其從兄(당위아어기종형)이 以魁偉之資(이괴위지자)로 世值极蕩(세치겁탕)하야 驥歩(기보)를 未展(미전)하고 終湮没松嵌巖草澤之中(종인몰송감암초택지중)하이 豈非至寃耶(기비지원야)아하고 又曰後承(우왈후승)이 孤寒(고한)하야 幽潜未闡(유잠미천)으로 嘆息不己(탄식부기)러니 日(일)에 袖公遺事及獨立有功先烈追慕典帖(수공유사급독립유공선열추모전체)하고 訪余于城東寓所(방여우성동우소)하야 請以銘其羡道(청이명기이도)어늘 顀此淺○(추차천○)이 何敢當是寄(하감당시기)리오. 辭之雖固(사지수고)나 ○之愈強(○지유강)이 오늘 遂按其狀而叙之(수안기장이서지)하니 曰公(왈공)은 迎日人也(영일인야) 휘(휘) 騋永(내영)이오. 字(자) 武範(무범)이오. 號(호) 竹橋(죽교)이니 滎陽公(형양공) 諱(휘) ○明(○명)이 爲上祖(위상조)오. 圃隱先生(포은선생) 諱(휘) 夢周(몽주)의 十九代孫(19대손)이며 影烏亭(영오정) 諱(휘) 連탁(연탁)의 十代孫(10대손)이라. 高祖(고조) 諱(휘) 文釆(문변) 曾
증조 휘 환운 조 휘 필기 고 휘 우용이며 비는 김녕김씨 중엽의 녀라. 유 3남 하니 순영 준영은 백계 이방이다. 공이 단기 4232년 기해 1월 19일에 부동 팔조리 제에서 출생하다. 자유로 재지초범하고 품성이 강직하며 의용이 과인하더니 급장에 서울 휘문의숙 중학교에 입학하여 소정과목를 수료하고 경성국치를 당한 후 강개불기하와 국권를 회복코저 지하운동하였으며 점차적 제동지와 규합하여 해외 있는 항일운동 단체와 연락 독립선봉에 신명를 바치기로 맹약하고 만주 등지에 무기와 탄약를 반입하고 영남 각 방면에 독립선언문를 영포하였다. 3.1운동은 거족적 거대한 단결이지만은 적의 무력 강압으로 실패하고 상해임시정부에 왕래 중 동를 통하여 각자 분담 지역에 군자금 모집를 전개하였다. 국가 민족를 위하여 생명 재산를 불원하고 일정 강압도 불원하면서 결사적 활동하다가 불행이 미결 3년 2년형 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만기 출옥 후 다시 동지를 찾아 광복단를 하든 중 8.15 해방을 맞었으니 공의 일생 숙원 단충은 이루어젔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0여년 고생 중 자부 김을희의 치성 봉양과 극력 구원함으로 김씨의게 본군 군수가 효부라 칭하고 표창이 유하였다. 기해 4월 23일에 종하니 원근 사우가 여비친척하고 ○우 팔조산 신좌원하니 적○자 수백인이다. 배 진주하씨 치운의 녀라. 생 병신 졸 신묘 묘는 홍덕산 축좌원이라. 생 3남 2녀하니 남은 종화 형화 대화오. 녀는 학성 이수춘 김해 김영섭이라. 종화 남에 연문 연주 연희오. 형화 남에 연하 연규 연보 연일이오. 대화 남 연우 연학이오. 연문 남에 동호라. 공지일생 포부가 조국광복과 민족구
증조 휘 환운 조 휘 필기 고 휘 우용이며 비는 김녕김씨 중엽의 녀라. 유 3남 하니 순영 준영은 백계 이방이다. 공이 단기 4232년 기해 1월 19일에 부동 팔조리 제에서 출생하다. 자유로 재지초범하고 품성이 강직하며 의용이 과인하더니 급장에 서울 휘문의숙 중학교에 입학하여 소정과목를 수료하고 경성국치를 당한 후 강개불기하와 국권를 회복코저 지하운동하였으며 점차적 제동지와 규합하여 해외 있는 항일운동 단체와 연락 독립선봉에 신명를 바치기로 맹약하고 만주 등지에 무기와 탄약를 반입하고 영남 각 방면에 독립선언문를 영포하였다. 3.1운동은 거족적 거대한 단결이지만은 적의 무력 강압으로 실패하고 상해임시정부에 왕래 중 동를 통하여 각자 분담 지역에 군자금 모집를 전개하였다. 국가 민족를 위하여 생명 재산를 불원하고 일정 강압도 불원하면서 결사적 활동하다가 불행이 미결 3년 2년형 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만기 출옥 후 다시 동지를 찾아 광복단를 하든 중 8.15 해방을 맞었으니 공의 일생 숙원 단충은 이루어젔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0여년 고생 중 자부 김을희의 치성 봉양과 극력 구원함으로 김씨의게 본군 군수가 효부라 칭하고 표창이 유하였다. 기해 4월 23일에 종하니 원근 사우가 여비친척하고 ○우 팔조산 신좌원하니 적○자 수백인이다. 배 진주하씨 치운의 녀라. 생 병신 졸 신묘 묘는 홍덕산 축좌원이라. 생 3남 2녀하니 남은 종화 형화 대화오. 녀는 학성 이수춘 김해 김영섭이라. 종화 남에 연문 연주 연희오. 형화 남에 연하 연규 연보 연일이오. 대화 남 연우 연학이오. 연문 남에 동호라. 공지일생 포부가 조국광복과 민족구
출에 혈성으로 제공함은 정부로부터 상실한 바 초대대통령 감사장에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함에 절대 공헌하였기 자에 충심으로 감사의 의를 표함이라 하였고 현 대통령껬어도 건국공로훈장를 하사하였으니 공지명은 가위 사어사의라. 외하췌언이리오. 명왈
살신성명은 고유현인인대 방의금자에 취의성인고 의사용심이 유구유신이라. 신자정부가 감표래선이라. 황황신필이 광동구천이라. 혁차정민하야 수시천춘이라.
단기 4312년 기미 위요절 월성손 진홍 근찬 병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