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 묘

4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나정리 산120-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일에 졸하니 묘는 포일산 임좌이다. 슬하에 5남을 두었으니 종학 종태 종문 종남 종국하고 학남 철수 복수 달수, 태남 인수 덕수, 문남 우수 판수, 남남 상수, 국남 진수 언수, 남 상훈이다. 여식은 월성 김학수이다. 공의 질 종옥이 묘지 비명을 청함에 내 본래 비재로서 적재 아닌 줄 모르는 바 아니나 조선총독부 서기 1924년 형공 제337호 및 대한민국 의병록에 의거지심이 지극함이 갸륵하고 내 평소 건국공로자인 공을 존경차 모하는 터이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공의 천재에 거적의 편린 새겨 후인의 귀감에 유하고저 한다.
서기 1995년 을축 10월 일 영일 정헌교 근찬, 영천 황보 옥 근서, 감역 종응
생가에 살고 계시는 손자 며느님께 김봉규 선생의 묘소 위치 안내를 부탁드렸는데, 가까운 곳이었다.
선산의 GPS 상의 주소는 경주시 감포읍 나정리 산 120-3이었다.
義士 寒松 金海金公 諱 鳳奎 之墓(의사 한송 김해김공 휘 봉규 지묘)
義士 寒松 金海金公 之墓(의사 한송 김해김공 지묘)
공의 휘는 봉규 자는 봉곤 호는 한송 성은 김씨요. 본관은 김해다. 가락국 수로왕을 시조로 하여 판도판서공의 22세손이요. 탁영의 15세손이다. 증조는 창련 조는 철두 고는 용술 비는 월성 김씨이다. 공 1892년 8월 30일 감포읍 나정리 본제에서 태어나니 천품이 총명호협하여 청운을 꿈꾸고 형설의 학문을 쌓다가 경술국치를 당했으니 이때 약관 19인 공은 비분강개한 나머지 국권회복에 이바지할 때를 기다리면서 외신상담하다가 마침 기미 3.1운동의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자 용약군중의 선봉으로 항거하다가 마침내 왜경에 피체 수감되어 3개월여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나라위한 굳은 결의는 추호도 굽힘이 없어 군국주의 주구들을 아연케 하였다. 그 뒤 의기는 더욱 격렬하여 1920년 4월부터 항일 구국운동에 투신 독립을 전취하려는 일념에서 상해임시정
부와 만주 등지의 독립단과 긴밀한 유대하에 송두환 최윤동 김종길 노기용 정내영 그밖에 여러 지사와 더불어 조국독립을 위하여 풍찬노숙하며 맹렬히 활약하였다. 각 지방의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국외로부터 무기를 반입하고 서경회 의용단 위임장 애국금 수합위원 사령서 군사경비단 단제인쇄물 등을 가지고 각처로 잠행하면서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수차 상해임정에 밀송금하였다. 그러다가 동년 12월 8일 동지 김종길과 독립군자금 모집차 의령군 모재벌가에 잠입하다가 매복중의 왜경에게 검거되어 경찰서로 연행 도중 권총으로 왜인순사 갑비수를 사살하고 동포 순사에겐 중상을 입힌 후 양인은 만주로 망명 탈출하여 4년여 조국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모종의 밀명을 띠고 밀입국하여 동지들과 공작 중 불행히도 1924년 한국독립운동단의 활동상황이 탄로되어 동지들과 함께 피검되니 혈기방장한 젊음의 나이로 사개성상 영어의 몸이 되었으니 이것은 경북항일단 한국독립운동 사건의 전말이다. 공은 출옥 후에도 불타는 투지는 꺽이지 않고 다시 동지들을 모은 한편 해동청년회라는 사밀조직 만들어 회관을 건립하고 후진들의 독립정신 고취에 쉴 줄을 모르시니 왜제하의 악랄한 예비 검속령이라는 올가미에 걸려 괴로움을 겪음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구국의 일편단심은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꿈에도 그리든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을 맞음에 감격과 환희 속에서 여생을 조국 대한의 자유번영과 향토발전을 위해 진력하시다가 1967년 2월 향년 76세로 영면하시니 묘는 전촌리 포일산 해좌이다. 장하도다. 굳굳한 기백으로 불사조같이 한 평생 지낸 공에게 대통령 건국훈장이 추서되니 그 뜻과 그 용기 후생의 귀감으로서 찬연히 빛나리라. 생각하면 조국이 국권을 되찾고 전국민이 재생의 기쁨을 누리게된 것 실로 공과 같은 투사들이 쏟은 정성의 소치라 아니할 수 없다. 배위는 월성 최씨 1892년 11월 9일에 나서 1964년 정월 14
부와 만주 등지의 독립단과 긴밀한 유대하에 송두환 최윤동 김종길 노기용 정내영 그밖에 여러 지사와 더불어 조국독립을 위하여 풍찬노숙하며 맹렬히 활약하였다. 각 지방의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국외로부터 무기를 반입하고 서경회 의용단 위임장 애국금 수합위원 사령서 군사경비단 단제인쇄물 등을 가지고 각처로 잠행하면서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수차 상해임정에 밀송금하였다. 그러다가 동년 12월 8일 동지 김종길과 독립군자금 모집차 의령군 모재벌가에 잠입하다가 매복중의 왜경에게 검거되어 경찰서로 연행 도중 권총으로 왜인순사 갑비수를 사살하고 동포 순사에겐 중상을 입힌 후 양인은 만주로 망명 탈출하여 4년여 조국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모종의 밀명을 띠고 밀입국하여 동지들과 공작 중 불행히도 1924년 한국독립운동단의 활동상황이 탄로되어 동지들과 함께 피검되니 혈기방장한 젊음의 나이로 사개성상 영어의 몸이 되었으니 이것은 경북항일단 한국독립운동 사건의 전말이다. 공은 출옥 후에도 불타는 투지는 꺽이지 않고 다시 동지들을 모은 한편 해동청년회라는 사밀조직 만들어 회관을 건립하고 후진들의 독립정신 고취에 쉴 줄을 모르시니 왜제하의 악랄한 예비 검속령이라는 올가미에 걸려 괴로움을 겪음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구국의 일편단심은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꿈에도 그리든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을 맞음에 감격과 환희 속에서 여생을 조국 대한의 자유번영과 향토발전을 위해 진력하시다가 1967년 2월 향년 76세로 영면하시니 묘는 전촌리 포일산 해좌이다. 장하도다. 굳굳한 기백으로 불사조같이 한 평생 지낸 공에게 대통령 건국훈장이 추서되니 그 뜻과 그 용기 후생의 귀감으로서 찬연히 빛나리라. 생각하면 조국이 국권을 되찾고 전국민이 재생의 기쁨을 누리게된 것 실로 공과 같은 투사들이 쏟은 정성의 소치라 아니할 수 없다. 배위는 월성 최씨 1892년 11월 9일에 나서 1964년 정월 14
일에 졸하니 묘는 포일산 임좌이다. 슬하에 5남을 두었으니 종학 종태 종문 종남 종국하고 학남 철수 복수 달수, 태남 인수 덕수, 문남 우수 판수, 남남 상수, 국남 진수 언수, 남 상훈이다. 여식은 월성 김학수이다. 공의 질 종옥이 묘지 비명을 청함에 내 본래 비재로서 적재 아닌 줄 모르는 바 아니나 조선총독부 서기 1924년 형공 제337호 및 대한민국 의병록에 의거지심이 지극함이 갸륵하고 내 평소 건국공로자인 공을 존경차 모하는 터이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공의 천재에 거적의 편린 새겨 후인의 귀감에 유하고저 한다.
서기 1995년 을축 10월 일 영일 정헌교 근찬, 영천 황보 옥 근서, 감역 종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