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사월리 15-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고문 경산시장 최재영 대구지방보훈청장 박병익 광복회대구경북연합지부장 김성권
경북산업대학총장 이효태 경상북도교육위원회부의장 정선경 경산시의회의장 서석봉
건립추진위원장 이장헌 부위원장 이상두 총무 이이영 재무 배부형 감역 권정일 서용택
위원 이흥세 오수백 이장철 홍재업 최기생 안병호 박순희 안병권 박두해 최상현 이춘락 이승락 박선호 윤성탁 이상춘 정우철
의거지사 의거대장 안창률 부대장 김명돌 1소대장 성상룡 2소대장 송수답 3소대장 김위도
특공대장 최기정 정보 김인봉 정보연락 박재천 박재달
대원 최만갑 채찬원 김경화 김임방 배상연 박혜광 박영식 김경룡 안팔십 이일수
조태식 최외문 이종태 채원준 최덕조 김특술 최동식 최태만 김홍준 최순한
경북산업대학총장 이효태 경상북도교육위원회부의장 정선경 경산시의회의장 서석봉
건립추진위원장 이장헌 부위원장 이상두 총무 이이영 재무 배부형 감역 권정일 서용택
위원 이흥세 오수백 이장철 홍재업 최기생 안병호 박순희 안병권 박두해 최상현 이춘락 이승락 박선호 윤성탁 이상춘 정우철
의거지사 의거대장 안창률 부대장 김명돌 1소대장 성상룡 2소대장 송수답 3소대장 김위도
특공대장 최기정 정보 김인봉 정보연락 박재천 박재달
대원 최만갑 채찬원 김경화 김임방 배상연 박혜광 박영식 김경룡 안팔십 이일수
조태식 최외문 이종태 채원준 최덕조 김특술 최동식 최태만 김홍준 최순한
功蹟碑 建立 誠金錄(공적비 건립 성금록)
경북 경산시 남산면 사월리 15-4 항일 대왕산 죽창의거 공적비
大王山 竹槍義擧 抗日運動(대왕산 죽창의거 항일운동)
일제가 우리 고유문화와 정신을 말살하고 최후의 발악적인 식민지 정책기 자행되던 1944년 6월 민족의 차별과 일제 압정을 성토하고 징병, 징용을 거부하며 조국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키로 결의했다. 본 항일운동은 남산면 거주 안창률 등 29명의 청년들이 대왕산에서 1944년 7월 25일부터 8월 13일까지 20여일 이상 죽창으로 일제의 총칼 및 비행기에 대항하면서 대왕산 정상에 돌로 성을 쌓고 막사를 지어 진지를 구축하고 3개 소대와 특공대, 정보연락대 등 결심대를 편성하여 3차례에 걸친 격전을 치르는 중 식량 조달차 하산하였다가 전원이 체포되어 경산경찰서에서 50여 일의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대구 형무소로 수감되어 보안법, 육해공 형법 위반, 치안유지 특별법 위반 등의 죄명으로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이 되었으나 안창율, 김경하 지사는 애석하게 옥사하였다. 지사들의 높은 기개와 숭고한 애국정신을 높이 찬양하며 후세에 길이 전하고저 경산시와 대구지방보훈청, 광복회 대구지부, 대구문화방송 등과 남산면민의 정성을 모아 1995년 5월 31일 제막식을 가졌다.
애국지사
대장 安昌律(안창률) 부대장 金命乭(김명돌) 1소대장 成相龍(성상룡) 2소대장 宋水沓(송수답)
3소대장 金渭道(김위도) 특공대장 崔基貞(최기정) 정보 金仁鳳(김인봉) 정보연락 朴在千(박재천), 朴在達(박재달)
대원 崔萬甲(최만갑) 蔡燦元(채찬원) 金璥和(김경화) 金任方(김임방) 崔東植(최동식) 崔泰萬(최태만) 金洪俊(김홍준) 崔順瀚(최순한)
裵相淵(배상연) 朴惠光(박혜광) 朴永植(박영식) 金慶龍(김경룡) 安八十(안팔십) 李日壽(이일수) 曺台植(조태식) 崔外文(최외문)
李鍾泰(이종태) 蔡元俊(채원준) 崔德祚(최덕조) 金特述(김특술)
일제가 우리 고유문화와 정신을 말살하고 최후의 발악적인 식민지 정책기 자행되던 1944년 6월 민족의 차별과 일제 압정을 성토하고 징병, 징용을 거부하며 조국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키로 결의했다. 본 항일운동은 남산면 거주 안창률 등 29명의 청년들이 대왕산에서 1944년 7월 25일부터 8월 13일까지 20여일 이상 죽창으로 일제의 총칼 및 비행기에 대항하면서 대왕산 정상에 돌로 성을 쌓고 막사를 지어 진지를 구축하고 3개 소대와 특공대, 정보연락대 등 결심대를 편성하여 3차례에 걸친 격전을 치르는 중 식량 조달차 하산하였다가 전원이 체포되어 경산경찰서에서 50여 일의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대구 형무소로 수감되어 보안법, 육해공 형법 위반, 치안유지 특별법 위반 등의 죄명으로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이 되었으나 안창율, 김경하 지사는 애석하게 옥사하였다. 지사들의 높은 기개와 숭고한 애국정신을 높이 찬양하며 후세에 길이 전하고저 경산시와 대구지방보훈청, 광복회 대구지부, 대구문화방송 등과 남산면민의 정성을 모아 1995년 5월 31일 제막식을 가졌다.
애국지사
대장 安昌律(안창률) 부대장 金命乭(김명돌) 1소대장 成相龍(성상룡) 2소대장 宋水沓(송수답)
3소대장 金渭道(김위도) 특공대장 崔基貞(최기정) 정보 金仁鳳(김인봉) 정보연락 朴在千(박재천), 朴在達(박재달)
대원 崔萬甲(최만갑) 蔡燦元(채찬원) 金璥和(김경화) 金任方(김임방) 崔東植(최동식) 崔泰萬(최태만) 金洪俊(김홍준) 崔順瀚(최순한)
裵相淵(배상연) 朴惠光(박혜광) 朴永植(박영식) 金慶龍(김경룡) 安八十(안팔십) 李日壽(이일수) 曺台植(조태식) 崔外文(최외문)
李鍾泰(이종태) 蔡元俊(채원준) 崔德祚(최덕조) 金特述(김특술)
抗日 大王山 竹槍義擧 功蹟碑(항일 대왕산 죽창의거 공적비)
抗日 大王山 竹槍義擧 功蹟碑(항일 대왕산 죽창의거 공적비)
삼성기전에 약 9천년 전 환국에 일신이 흑수와 백산의 땅에 동남동녀 800명이 내려와 돌을 쳐서 불을 만들어 음식을 익혀서 먹는 법을 가르켰다. 뒤에 환웅씨가 일어나 천신의 소를 받들어 청구에 정지를 정하고 천부인을 가지고 오사를 주관하여 재세이화로 홍익인간하였다. 1876년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서양 각국이 내정을 간섭하며 동학란을 계기로 일청전쟁에 패한 청국은 수백 년 이어져 온 종국권을 포기하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화하는 비극이 시작되었다. 을미개혁으로 단발령과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배일감정이 극도에 도달하여 의병항쟁의 도화선이 되어 거의벌왜라는 대의명분으로 구국투쟁이 전개되었다. 독립지사들은 무력으로 국권회복의 인재양성으로 요인암살이라는 수단으로 이등박문을 비롯한 요인을 저격 대한남아의 기개를 세계만방에 떨쳤다.
대왕산(성남산)은 북위 35도 동경 128도의 경산시와 청도군에 위치한 표고 605m의 준산이며 동으로 호거산(운문산) 서로 선의산 북으로 팔공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명산이다. 민족해방을 앞둔 1944년 7월 5일 밤 사월동 5번지 문용수 씨의 참외밭 원두막에 모인 박재달 박재천 김인봉 등 3인은 일본의 패망이 확실하니 일본에 협력해서는 안되며 징용 징병을 거부하고 항일
대왕산(성남산)은 북위 35도 동경 128도의 경산시와 청도군에 위치한 표고 605m의 준산이며 동으로 호거산(운문산) 서로 선의산 북으로 팔공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명산이다. 민족해방을 앞둔 1944년 7월 5일 밤 사월동 5번지 문용수 씨의 참외밭 원두막에 모인 박재달 박재천 김인봉 등 3인은 일본의 패망이 확실하니 일본에 협력해서는 안되며 징용 징병을 거부하고 항일
운동을 전개하여 왜놈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로 결의하였다. 7월 8일 속칭 웅굴매기에서 박재달 성상용 김인봉 박재천 최동식 김임방 김위도 최외문이 다시 모여 거사를 다짐하고 동지 규합에 나섰으며 7월 15일 밤 자인면 원당보에서 동지 29명이 모여 돌이 많고 산세가 험한 대왕산에 진지를 구축하여 신축 중에 있는 남산주재소를 습격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정하고 각자 준비에 착수하였다. 초기는 구할수 없어 자인면 왕천동 대장간에서 쇠창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각의 위험성이 있어 이를 중단하고 8월 25일 밤 죽창으로 무장하고 3방면으로 대왕산에 집결하였다. 26일 아침 태양을 향하여 안창율 지사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산신단에 성상용 지사의 부친 성웅 옹이 지은 축문을 낭독 제를 올리고 거사의 성공을 빌었다. 3개소대와 특공대 정보대를 조직하고 산정에 돌로 성을 쌓아 입초불침번을 두어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으며 26일 오후 3시 무장한 일경 30명의 기습 발포에 맞서 돌과 죽창으로 응전 일본 비행기가 상공을 선회하며 위협하였으나 일경을 물리친 지사들은 사기충천 대한독립만세를 한없이 외쳤다. 8월 1일 오전 일경 40명이 다시 공격해오매 3시간의 격전후 적이 물러갔으나 보급이 끊기고 식량이 바닥이다. 식량 조달차 분산 하산한 지사들은 8월 10일에서 13일 사이 전원 체포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경산경찰서에서 50여 일의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어 보안법 육해공 형법 위반 폭력행위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명으로 옥고를 치르고 8.15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안창율 김경화 지사는 애석하게 옥사하였다. 1986년 12월 16일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게 되었으나 심사과정에서 6명이 제외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우리 공적비건립위원회는 1개면에서 22명의 독립유공자를 낸 것이 이 고장의 자랑으로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경산시와 대구지방보훈청 광복회 대구경산 연합지부 대구문화방송주식회사와 성금을 보내주신 분들의 도움으로 남산면민의 정성을 모아 일제에 죽창으로 항거한 지사의 기개와 숭고한 애국정신을 높이 찬양하며 이 비를 세워 후세에 길이 전하고저 하노라.
서기 1995년 4월 일 건립위원장 이장헌 지음, 공적비건립위원회 세움, 소당 조광호 송호 이공우 씀
서기 1995년 4월 일 건립위원장 이장헌 지음, 공적비건립위원회 세움, 소당 조광호 송호 이공우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