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545-1
- 탐방로그
-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545-1 마을입구에 위치한 윤중수 선생 공적비를 찾았다. 선생의 공적비는 선생의 생가인 묵와고택 주변에 위치해 있었다. 선생의 생가인 묵와고택과 함께 선생의 공적비를 둘러보는 것도 탐방 코스로 추천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마을 입구에서 윤중수 선생의 공적비를 만났다.
獨立志士 尹公 晩松 功績碑(독립지사 윤공 만송 공적비)
만송은 윤중수 선생의 호이다.
만송은 윤중수 선생의 호이다.
천년 신라의 해거름 나절 법은을 보답코자 한 구중인의 뜻이 가야산 골짝 홍류동 물소리 사이로 현당암 마당에 절집 기둥 이습는 도끼소리로 울려왔었다. 반천년 조선조가 기울던 서기 1891년 4월 2일에 그 고을 경남 합천군 묘산면서 독립운동의 지사로서 ○생한 윤중수 공이 고고의 소리 높이 태여났은 즉 본관은 파평인 자는 시백으로 만송을 호 삼았다. 신묘년에 출생하고 신미년에 영면하니 41세의 생애였다. 상조 태사공 화달의 5세손인 문숙공 예당군의 후예로서 고의 휘는 석우이고 호는 화산이다. 공은 어려서 한학하다가 시천에 따라 개화를 사상하고 대구 달성고보를 거쳐 서울보성전문학교를 다녔다. 마침내 경술국치를 당하매 울연 분발한 공은 조국광복의 길에 헌신코저 입지하였다. 경향 곳곳을 순역하면서 주로 유림 중에서 동지를 구하고 규합하여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정치운동단체로서 유림단을 조직하는대 선배 동지인 김창숙과 더불어 주도적으로 활약하였다. 1919
기미년 3.1독립만세 소리 터지고 운동의 여세와 이미 해외에 망명 중인 애국지사들이 상해에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울 제 유림단 대표도 고유돼 정식 참여했다. 5월 파리서의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매 상해 임정에선 김규식을 대표로 보내어 독립청원서를 내기로 하는데 기회삼아 유림단 따로 독립청원서를 만들어 그 분을 통해 파리회의에 내기로 결의했다. 김창숙 유진태 이중축 김정호 성태영 유예근 등 그 운동 참여인사들은 청원서를 김창숙을 대표로 상해 임정에 전달키로 하여 그 전야의 장송 자축자리에서 공이 선창한 정기가는 좌중을 숙연 비장케 했던 바 공은 함경남북도책이였고 모두 명성 높은 173 인사로써 매듭지었다. 그 서명 날인장과 함께 세칭 파리장서를 만들어 아울러 김창숙 편 임정으로 보내다. 그 글은 면우 곽종석이 지었다. 이 거사 뒤에도 공은 국내외의 활약 중 만주 무순에서 왜경에 체포돼 5개월 넘게 옥고 이후 북경에서 김창숙 신채호 등과의 재회로 운동사를 협의했음이 김창숙 저인 벽옹일기와 파리장서 약사에 실려있다. 천석유재를 촉망받는 아이들의 장학금과 난처한 동지들의 가계를 돕기에 끝내 쾌척했고 부유 친지들께 불선자금을 모아 운동에 공헌하였다. 10년 앞서 공의 묘비에 중제 김황은 찬하여 「이것은 오직 저 시백의 무덤이언만 그 충성된 기백과 의로운 넋은 흙으로 화하지 않고 5척 해바라기가 돼 해를 향해 피어있도다!」고 찬탄했으며 1990년 나라에선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슬픈지고! 미처 광복을 앞서 즈려가심이여! 애족 자비및 부석신명턴 위국정기는 은은할 손 해인의 범종소리로 겨례 혼의 산맥 깊이 영생하리라.
단기 4327년 갑술 8월 일 수
광복회 경남지부장 벽창수 근찬, 불초자 두식 경서
단기 4327년 갑술 8월 일 수
광복회 경남지부장 벽창수 근찬, 불초자 두식 경서
건립추진위원 (무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