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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유전리 896-3
- 탐방로그
- 합천군 대병면 유전리 896-3에 위치한 은진송씨 세거지의 독립운동자 파리장서 유적비를 찾았다. 이 곳에는 독립운동자 파리장서 유적비 외에도 4개의 비석(은진송씨 합천 세거비, 은진송씨 충순위공파 세거비, 존양재 송선생 유적비, 봉암서원 유허비)을 찾아볼 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의병으로 싸웠던 이 집안의 호국정신이 한말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파리장서 의거 후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겨레의 혼이 살아있는 고장 합천군 대병면의 은진 송문에서는 파리장서비를 새로 건립하여, 송문의 애국사를 비롯한 서명자 제위의 높고 큰 뜻을 기리고자 한다.
서기 2018년(단기 4351년) 3월 일
경북대학교 교수 영남문화연구원장 문학박사 정우락 삼가짓고 비제 족후학 송학부 삼가쓰고 은진송씨 충순위공파 종중 비건립추진위원회 삼가 세우다.
서기 2018년(단기 4351년) 3월 일
경북대학교 교수 영남문화연구원장 문학박사 정우락 삼가짓고 비제 족후학 송학부 삼가쓰고 은진송씨 충순위공파 종중 비건립추진위원회 삼가 세우다.
은진송씨 충순위공파 세거비
...전략...
임진왜란때는 참의공 기의 아들인 희순, 희철, 희달 삼형제가 의병을 창의하여 활동하였다. 경모재는 망우당 곽재우와 함께 싸운 화왕산 전투에서 순국하였다. 유림을 대표하여 파리만국회의에 독립을 호소한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인 중 5명이 충순위공의 후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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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는 참의공 기의 아들인 희순, 희철, 희달 삼형제가 의병을 창의하여 활동하였다. 경모재는 망우당 곽재우와 함께 싸운 화왕산 전투에서 순국하였다. 유림을 대표하여 파리만국회의에 독립을 호소한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인 중 5명이 충순위공의 후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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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양재 송선생 유적비
봉암서원 유허비
합천군 대병면 유전리 896-3 은진송씨 세거지의 독립운동자 파리장서 유적비를 찾았다.
은진송씨 합천 세거비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
정와(貞窩) 송호기(宋鎬基) 계산(桂山) 송재락(宋在洛) 의재(毅齋) 송호완(宋鎬完) 상헌(尙軒) 송철수(宋哲秀) 항재(恒齋) 송호곤(宋鎬坤)
파리장서 유적비(巴里長書 遺蹟碑)
정와(貞窩) 송호기(宋鎬基) 계산(桂山) 송재락(宋在洛) 의재(毅齋) 송호완(宋鎬完) 상헌(尙軒) 송철수(宋哲秀) 항재(恒齋) 송호곤(宋鎬坤)
파리장서 유적비(巴里長書 遺蹟碑)
1950년 을사늑약과 1910년의 경술국치로 한반도는 조선왕조 건국 27대 519년 만에, 대한제국이 성립된 지 18년 만에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 36간 우리민족은 식민지 침탈을 극복하고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항쟁을 벌였다. 유림은 항일의병투쟁, 독립운동단체결성, 자결순국, 상소 등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그 중에서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파리장서운동)은 전국의 유림이 조직적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이다. 1918년 1월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에 이은 세계정세의 변화와 1919년 1월 고종의 갑작스러운 붕어 소식은 전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고종의 장례를 계기로 국내에서는 천도교, 불교, 기독계가 중심이 되어 3월 1일 독립선언문이 공포되고, 대한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간다. 3.1운동과 비슷한 시기에 유림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독립청원서를 독자적으로 보내기로 결의한다. 영남유림을 대표하는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이 장문의 글을 짓고, 호서유림을 대표하는 지산(志山) 김복한(金
福漢) 등 각 지역의 명망 있는 인물 137인의 죽음을 각오하고 여기에 서명하였다. 이 장서를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노끈으로 꼬아 짚신을 만들어 1919년 3월 28일 상해 임시정부로 가지고 갔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를 다시 영어, 불어, 독어로 번역하여,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 편으로 파리 강화회의에 전달토록 하는 한편, 외국의 공관과 언론기관을 비롯해 국내의 각 향교 등 주요기관에 우송하였다. 파리장서는 일제의 부당한 주권강탈이 결코 한국이 원하는 것이 아니며 만국공의(萬國公議)에도 위배되는 일이고, 우리는 나라 없이 살기보다는 차라리 나라를 지키다 죽는 것을 바라며, 결코 일본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 이라는 결의를 밝히고, 우리의 독립을 도와달라는 내용이다. 파리장서운동은 국내외의 각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한민족의 민족독립에 대한 염원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이 드러난 후 일제는 서명자를 비롯하여 유림인사 수백 명을 체포하였으며, 서명자들은 고문을 당하고 수개월에서 수년 간 옥살이를 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명 중 합천군이 11명이다. 합천군의 서명자 중에서 7명이 대병면 사람이니, 정와(貞窩) 송호기(宋鎬基), 계산(桂山) 송재락(宋在洛), 의재(毅齋) 송호완(宋鎬完), 상헌(尙軒) 송철수(宋哲秀), (족보명 송기용(宋箕用)) 항재(恒齋) 송호곤(宋鎬坤)과, 겸산(謙山) 문용(文鏞), 죽포(竹圃) 박익희(朴翼熙)가 바로 그들이다. 이중에서 송호기, 송재락, 송호완, 송철수, 송호곤은 모두 은진송씨(恩津宋氏) 충순위공파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려서는 난곡(蘭谷) 송희일(宋熙馹)과 상강(常岡) 송민용(宋民用)에게서 배우고, 장성해서는 곽종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유가(儒家)의 덕목을 함양하고 실천했다. 파리장서운동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니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과 2006년에 모두 독립유공자로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같은 문중에서 5명 이상이 파리장서에 서명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곳 후손들은 망루계(望樓契)를 조직하여 선대의 아름다운 충절(忠節)을 잊지않고 오랜 세월동안 숭모(崇慕)의 정신을 기려오고 있다. 이들의 의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