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익희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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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역평리 산1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가의 전통교육을 받아 장래가 크게 촉망되었으나 마침 어지러운 싣개를 만나 큰 경륜을 펼치지 못하고 초야에서 일생을 보내게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깝게 한다. 그러나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왜인의 위협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서명에 참여하였으니 그 정신이 의연하였다. 세월이 흘러 남긴 시문은 다 흩어져 그 훌륭한 자취가 점점 인멸되고 마는 것을 걱정하여 손자 정종 장손계 제창과 종손자 채회가 모집한 문적과 족보를 들고 불초를 찾아와 사적비를 지어 줄것을 요청하였다. 불초가 공의 명성만 들어 알 뿐 세계와 구체적 사적을 알지 못 하다가 이제 자료를 보고 공의 훌륭한 행적을 알게되었다. 그 정신을 존숭하여 크게 사양하지 않고 행적을 서술하고 긑에 명을 붙인다. 송은졸당 후예로서 윤산공의 현윤이라 가정지학 계승하여 선비정신 두루갖춰 탐욕에 찬 왜놈들이 조국강토 유린했네. 저 악날한 채찍아래 동포들이 신음했네 민족걱정 선비들이 목숨바쳐 일어섰네 연명으로 보낸 장서 전세계가 진동했네 왜놈들의 고문에도 늠연했던 그 기개라 쇠퇴해진 민족정신 이리인해 회복했네 훌륭했던 그자취가 광음흘러 인멸되니 후손들이 두려워서 자료모집 정성다해 행적새긴 사적비는 천추만세 전하리라. 세인들은 읽어보고 송의 정신 본받기를
癸巳(2013)년 입춘절 경상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허권수 근찬
거창후인 신재범 대자 전 근서
합천군 대병면 역평리 산 15 독립유공자 죽포(竹圃) 박공 熙翼(희익) 사적비를 찾아왔다.
보이는 묘소는 죽포 선생의 부친이신 계구당(戒懼堂) 朴孝英(박효영) 선생의 묘소.
부친 묘소 옆에 독립유공자 죽포(竹圃) 박공 熙翼(희익) 사적비가 서 있다.
사적비 병서(幷序)

조선왕조는 유교를 국교로 하여 많은 선비를 길러냈다. 선비들은 국가민족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목숨을 바쳐 분연히 일어섰다. 임진왜란때는 의병이 나라를 구하는 데 큰 공훈을 세웠고 조선 말기에 이르러 나라가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울 때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구국의 대열에 앞장섰다. 불행하게도 경술(1910)년 왜적에게 나라를 잃은 이후로 선비들은 혹은 국내에서 혹은 외국에서 끊임없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이 33인의 민족대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선비가 안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유림의 큰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까닭으로 3.1운동 직후 유림은 면우 곽종석선생을 중심으로 유림대표 137명이 힘을 규합하여 파리에서 개최되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우리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든 장서를 보냈다. 왜놈들의 압제가 가혹하던 시절에 파리장서에 서명하는 것은 목숨을 바칠 결심이 되어 있어야 햇는데 일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고 분연히 앞장서 서명한 분이 계시니 바로 죽포 박공이다. 공의 휘는 翼熙(익희) 자는 장언 죽포는 그 호이다. 본관은 밀양인데 신라 왕자 밀성대군이 봉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려조
의 태사중서령 문하시중 밀성부원군 휘 彦孚(언부)를 중조로 삼는다. 이름난 인물과 큰 학자들이 많이 나왔다. 고려말 송은 휘 聰(총)은 이학으로 이름이 있었는데 포은등과 제명(齋名)하였다. 관직이 예조시랑 중서령에 이르렀으나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버리고 밀양으로 돌아왔다. 왕조에서 불렀으나 망복(罔㒒)의 의리를 지켰다. 나중에 좌의증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숙으로 단성의 신계서원 밀양의 덕남서원 청도의 용강서원등에 향사되어 있다. 그 아들 졸당(拙堂) 휘 총(聰)은 포은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길야은 변춘정 등과 도의지교를 맺었다. 천거로 관직에 나가 정랑으로 있다가 권귀와 뜻이 맞지않아 물라났다. 만년에 밀양에서 삼가 대평 송지촌으로 옮겨와 터를 잡았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신계서원에 종향되어 있다. 그 5대손 휘 천우(天祐)는 진사인데 임진왜란때 창의하여 공을 세워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그 5대손은 휘 수권(守權)인데 곧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괴로(槐盧) 휘 민우고 조부는 휘 기수고 부공은 윤산 휘 효영으로 학행이 있어 유림의 추중을 받았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를 받았고 문집 "윤산집"을 났겼다. 모친은 숙부인 은율송씨로 택량의 다님이다. 공은 1853(철종 4)년 음력 4월 24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기국이 컸다. 윤산공의 훈도를 받아 경사를 널리 읽고 선빌의 자세를 익혔다. 자라서는 후산 허유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의 깊이를 더 하였다. 면우 곽종석 노백헌 정재규 농산 정면규등과는 서로 교왕하며 학문을 강마하였다. 조선말기에 이르러 국가가 내와적으로 혼란하였으므로 과거를 버리고 산수 속에서 독서하며 풍속을 선도하고 향촌의 학도들을 가르쳤다. 또 지극한 효성으로 윤산공을 위하여 빈객접대와 가사를 맡아 처리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한 이후로는 은둔하여 지절을 지켰다. 1919년 파리장서에 서명한 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왜경의 잔인한 고문에도 의연하게 대응하니 왜경들마저도 감복하였다. 이미 나라가 망하 민족정신이 무너져가고 있었는데 공의 이런 서비자세는 우리 민족에게 큰 정신적 원기가 되었다. 이떄 같이 옥고를 치른 후손들이 모여 망우계를 모아 그 정신을 길이 기리고있다. 1922년 3월 27일 별세하니 향년 70이었다. 원근의 모든 사람들이 공의 별세를 아까워하였다. 배위는 강진안시와 전주이씨이다. 아들은 규복 규건 규곤이다. 규복은 호가 축암이다. 규복의 아들은 종운 종천이고 규건의 계자는 종종이다. 규곤의 아들은 종화 정종인데 정종은 규건앞으로 출가하였다. 맏손자 종운은 아들이 없어 종천의 아들 제창을 후사로 삼았다. 정종의 아들은 효제다. 종화의 아들은 선제 봉제다. 제창의 아들은 동철 동영 동배이다. 아아! 공은 선비 가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