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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831-1
- 탐방로그
-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831-1에 위치한 전성범 선생 공적비를 찾았다. 의병장 정선전공 성범 공적비 옆에는 구 묘비가 같이 있었다. 전성범 장군의 묘는 2007년 10월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었기에 묘비를 공적비가 있는 이 곳으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해당 사적지에는 공적비와 구 묘비 이외에도 헌성비 등 전성범 장군을 기리기 위한 비석들이 여럿 위치하고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병장 고, 전성범 장군의 묘소는
경남 함양군 서하면 다곡리 산 500번지에서 이장하여 대전국립묘지로 안치하면서 자손(손자 한식, 창식 외)이 이 글을 남깁니다. 서기 1911년 3월 7일 독립운동 의병생활 중 대구교도소에서 일본군 판사의 판결로 의하여 사형 당하시니 향년 41세에 졸하시여 후손에 의하여 당신의 몸은 대전국립묘지로 안치하였고 묘비가 공적비가 있는 이곳으로 안장하였다. 묘소는 서기 2007년(정해)년 양력 10월 29일에 파토 이장하여 동년 10월 30일 정부의 의식 하에 대전국립묘지로 모시였다.
경남 함양군 서하면 다곡리 산 500번지에서 이장하여 대전국립묘지로 안치하면서 자손(손자 한식, 창식 외)이 이 글을 남깁니다. 서기 1911년 3월 7일 독립운동 의병생활 중 대구교도소에서 일본군 판사의 판결로 의하여 사형 당하시니 향년 41세에 졸하시여 후손에 의하여 당신의 몸은 대전국립묘지로 안치하였고 묘비가 공적비가 있는 이곳으로 안장하였다. 묘소는 서기 2007년(정해)년 양력 10월 29일에 파토 이장하여 동년 10월 30일 정부의 의식 하에 대전국립묘지로 모시였다.
獻誠碑(헌성비)
헌성비
설송 정선 전공 성범 장군의 거룩한 의병항쟁사가 구전으로만 전해오다가 독립운동사 왜경 기록 화승총 등이 발굴됨으로써 비로소 장군의 애국위업이 세상에 드러났다.
1994년 12월 경향 각지의 사림들을 중심으로 장군의 공적비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추진한 끝에 드디어 1995년 11월 12월 준공하기에 이르니 감개무량하다 이에 거룩한 이 사업에 물심양면으로 협찬해 주신 분들의 고귀한 뜻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조그만 돌에 아로새기는 바이다.
1996년 12월 1일
의병장 정선 전공 성범 장군 공적비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박재현, 본부장 전중신, 부본부장 전순은, 부본부장 전말웅
설송 정선 전공 성범 장군의 거룩한 의병항쟁사가 구전으로만 전해오다가 독립운동사 왜경 기록 화승총 등이 발굴됨으로써 비로소 장군의 애국위업이 세상에 드러났다.
1994년 12월 경향 각지의 사림들을 중심으로 장군의 공적비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추진한 끝에 드디어 1995년 11월 12월 준공하기에 이르니 감개무량하다 이에 거룩한 이 사업에 물심양면으로 협찬해 주신 분들의 고귀한 뜻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조그만 돌에 아로새기는 바이다.
1996년 12월 1일
의병장 정선 전공 성범 장군 공적비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박재현, 본부장 전중신, 부본부장 전순은, 부본부장 전말웅
義兵將 旌善全公 聖範 功績碑(의병장 정선전공 성범 공적비)
공은 휘가 주대 자는 성범 호는 설송이며 정선인이시다. 고려 두문충현 전법판서 오륜공의 13세손 진사 세량공 증손으로 휘 재연공과 밀양박씨의 4자로서 고종 7년 1870년 6월 13일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에서 태어났다. 본디 용의가 준정하고 기골이 장대하며 기상이 호매하고 효용이 절이하므로 사람들의 촉망을 한 몸에 받앗다. 16세에 선친을 잃었으나 효우의 천성이 돈독했으므로 백중 숙형을 엄부와 같이 섬겨 대소사를 품의하여 처결했으며 현우귀천을 가리지 않는 선각자적인 사상을 가졌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공을 따르고 흠모하였다. 공은 5세때부터 한문을 사숙한 이래 문충공 연재 송병선 선생에게 사사를 받아 유학에 진력하였으나 국운이 기울자 청운의 뜻을 펴지 못하고 애국애족의 형극의 길을 선택하였다. 고종 42년 1905년 11월 한일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망국의 비운을 당하자 1906년 5월 덕유산에서 봉기한 전 사헌부시평 면암 최익현 선생의 휘하에 경남 안의의 전성범 문태서 전북 옥강의 문형모 정읍의 임병찬 전주의 최학엽 유예로 익산의 박이환 전남 영광의 김병섭 등의 의병장들이 기병하여 구국의 선봉에 섰다. 동년 9월 전북 장수 양악에서 의병장 박춘실과
합세하여 왜군이 주둔한 장수읍을 함락하였고 익년 8월 거창에서 왜적과 접전한 후 진주의병장 유종환과 함께 전북 진안 용담 금산 등지에서 격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었다. 1907년에는 박춘실을 선봉장으로 하고 공과 문태서를 중군장으로 연합의병대를 편성하여 장수 무주의 덕유산과 구천동 적상산 진안 천봉산과 성수산 등지에서 60여차례 유적전과 백병전을 벌여 왜적 300여명을 사살하고 무기 400정을 노획하는등 혁혁한 전공을 거두었다. 1909년 2월에 안의 4월에는 거창에서 혈전고투했으나 의병의 많은 사상과 피해가 있었다. 익년 8월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빼았기자 1901년 1월에 다시 의병을 규합하여 장수 양악에서 왜적과 치열한 사투를 벌인 끝에 피체 대구감옥에 투옥되었으나 즉시 탈옥하여 합천 유원중 택에서 피신하던 중 불행하게도 다시 체포되었다. 왜경의 모진 고문과 악형에도 끝내 굴하지 않고 7일간 단식과 함구불언 끝에 안타깝게도 동년 3월 7일 옥사하니 향년 41세였다.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헌신하여 형극의 길을 걸어온 애국애족의 성스런 일생이었다. 1909년 무주군민들이 의병장 전성범 박춘실 문태서 장군의 항일전공을 기려 공적비를 건수하였으나 왜경에 의해 강제 철거되고 말았다.
서거 71년만에 민중과 손 한식 창식 형제가 의병항쟁사와 재판기록 등을 모집하여 1982년 8월 15일 정부로부터 애국지사로 대통령표창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족장 1994년 6월 1일 국가유공자증을 받으니 오직 일편단심 나라를 위한 공의 위훈이 현현케 된 결과이다. 배위 하동정씨는 일두 문헌공 정여창 선생의 후손 환세의 따님으로 1878년 6월 14일 출생하여 1920년 6월 22일 졸할 때까지 왜적의 온갖 만행과 악형을 감내하면서 공의 높은 뜻을 이루게 한 현숙한 반려자였다.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안산에 공과 합장되었는데 함양군을 통해 국비 지원을 받아 1994년 10월 29일 새로인 묘역을 단장한 바 있고 광복 50주년이 되는 오늘 장군의 애국위훈을 면암 의병록 독립유공자 공훈록 독립운동사 함양군지 안의읍지 등의 문헌에 기초하여도 그만 돌에 명하니 평생 나라를 위한 공의 숭고한 애국정신
서거 71년만에 민중과 손 한식 창식 형제가 의병항쟁사와 재판기록 등을 모집하여 1982년 8월 15일 정부로부터 애국지사로 대통령표창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족장 1994년 6월 1일 국가유공자증을 받으니 오직 일편단심 나라를 위한 공의 위훈이 현현케 된 결과이다. 배위 하동정씨는 일두 문헌공 정여창 선생의 후손 환세의 따님으로 1878년 6월 14일 출생하여 1920년 6월 22일 졸할 때까지 왜적의 온갖 만행과 악형을 감내하면서 공의 높은 뜻을 이루게 한 현숙한 반려자였다.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안산에 공과 합장되었는데 함양군을 통해 국비 지원을 받아 1994년 10월 29일 새로인 묘역을 단장한 바 있고 광복 50주년이 되는 오늘 장군의 애국위훈을 면암 의병록 독립유공자 공훈록 독립운동사 함양군지 안의읍지 등의 문헌에 기초하여도 그만 돌에 명하니 평생 나라를 위한 공의 숭고한 애국정신
과 송백 같은 절조는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공의 장자 영직은 만주로 피신하여 풍찬노숙의 험난한 고초를 겪다가 45세로 요절했으나 다행히도 자부 김해김씨 애세 슬하에 손 한식 창식 증손 병대 성원 문범 지현 현수 현정을 두었다.
공의 후손과 문중 모두 보본추원의 뜻을 드높이며 나에게 명문을 청하기로 내 비록 문장이 짧고 용렬하나 설송 장군의 피땀어린 애국투혼의 성스런 행적을 더듬어 삼가 찬하는 바이다.
단기 4328년 10월 일 서기 1995년 10월 일
철학박사 안호상 찬, 초재 전종 서, 초안 교열 문학박사 전일환 도암 엄형휴
공의 후손과 문중 모두 보본추원의 뜻을 드높이며 나에게 명문을 청하기로 내 비록 문장이 짧고 용렬하나 설송 장군의 피땀어린 애국투혼의 성스런 행적을 더듬어 삼가 찬하는 바이다.
단기 4328년 10월 일 서기 1995년 10월 일
철학박사 안호상 찬, 초재 전종 서, 초안 교열 문학박사 전일환 도암 엄형휴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881 거연정휴게소. 옆에 있는 의병장 정선전공 성범 공적비를 찾아왔다.
황석산성(黃石山城)
경상남도 사적 제322호 /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안의면과 서하면의 경계인 황석산(1,190m) 정상에서 좌우로 뻗는 능선을 따라 계곡을 감싸듯 쌓은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이다. 성벽은 돌로 쌓은 부분과 흙과 돌을 섞어 쌓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체길이는 2,750m, 높이는 3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동쪽에 작지만 문루(門樓)를 갖추고 있다. 성안동쪽의 계곡 주변에서는 크고 작은 건물터가 확인되고 있다. 현재 면적은 446,186㎡ 정도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내용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영호남의 관문으로서 전북 장수와 진안으로 통하는 요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포곡식산성의 구조로 보아 가야를 멸망시킨 신라가 백제와 대결하기 위해 쌓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는 함양군수 조종도와 안의현감 곽준 등이 왜적과 격전을 벌였으며, 500여명이 순국하기도 하였다.
경상남도 사적 제322호 /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안의면과 서하면의 경계인 황석산(1,190m) 정상에서 좌우로 뻗는 능선을 따라 계곡을 감싸듯 쌓은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이다. 성벽은 돌로 쌓은 부분과 흙과 돌을 섞어 쌓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체길이는 2,750m, 높이는 3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동쪽에 작지만 문루(門樓)를 갖추고 있다. 성안동쪽의 계곡 주변에서는 크고 작은 건물터가 확인되고 있다. 현재 면적은 446,186㎡ 정도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내용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영호남의 관문으로서 전북 장수와 진안으로 통하는 요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포곡식산성의 구조로 보아 가야를 멸망시킨 신라가 백제와 대결하기 위해 쌓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는 함양군수 조종도와 안의현감 곽준 등이 왜적과 격전을 벌였으며, 500여명이 순국하기도 하였다.
애국지사 전성범(全聖範) 선생 공적비 안내
1906년 5월 덕유산에서 봉기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중군장이 되어 1911년 1월 장수 악양대전에서 피체될 때까지 5년간 의병대장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과 악형에 고생하시다 동년 3월 7일 대구감옥에서 옥사하셨다.
묘지는 서기 2007(정해)년 양력 10월 29일에 서하면 다곡리 415번지에서 파토 이장하여 동년 10월 30일 정부의 의식하에 대전국립묘지로 안치하였으며, 묘비만 공적비가 있는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함양군
1906년 5월 덕유산에서 봉기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중군장이 되어 1911년 1월 장수 악양대전에서 피체될 때까지 5년간 의병대장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과 악형에 고생하시다 동년 3월 7일 대구감옥에서 옥사하셨다.
묘지는 서기 2007(정해)년 양력 10월 29일에 서하면 다곡리 415번지에서 파토 이장하여 동년 10월 30일 정부의 의식하에 대전국립묘지로 안치하였으며, 묘비만 공적비가 있는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함양군
義兵將 雪松全公 聖範 將軍 墓 孺人 河東鄭氏 雙墳 右窆 之墓
(의병장 설송전공 성범 장군 묘 유인 하동정씨 쌍분 우폄 지묘)
(의병장 설송전공 성범 장군 묘 유인 하동정씨 쌍분 우폄 지묘)
의병장 전공 성범은 정선후인이요 려말 전법판서 채미헌공의 16세손이시다. 고 휘는 재연이요비는 거창신씨 재항지녀이시다. 고종 7년 경오 6월 13일에 함양 서하봉전에서 태어나셨고 배위는 하동정씨 환세지녀이시다. 고종 41년 갑진 령두에 일제가 노일전쟁을 유발하여 시세○승하자 대한제국을 보호국과 병합의 야욕하에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경국지존망이루○위기에 처하였다. 서기 1906년 병오 4월 13일 전 사헌부 지평 면암 최익현 선생은 정읍 무성서원에서 동양평화와 대한민족 자주성 수호를 위하여 8도사민이 총궐기대회를 열고 의병장 봉기 격문을 열읍에 하달하여 왜적과 항쟁을 선언하였다. 1906년 5월 면암 선생이 덕곡산에서 의병 봉기의 기치를 드높이자 설송장군은 선생 막하의 중군장이 되셨다. 1907 안의전투에서 의병 58인이 전사한 뒤 진주의병장 유종환과 합세하여 전북 용담 금산 영동에서 격렬하게 교전한 끝에 왜 수백명을 사상하였다. 4월에 거창전투를 벌였고 1911년 신해 정월 장수 양악대전에서 장군이 피체되여 대구감옥에 수감되었으나 즉시 탈옥하여 합천 대병 회동 유중원 씨 택에 피신하셨다. 그러나 얼마 후에 왜병에 다시 체포되여 목불인견의 잔혹한 고문과 7일 단식 끝에 1911년 신해 3월 7일 서거하니 향수 42세셨다. 배위 하동정씨 환세지녀는 무인 6월 14일에 태어나 경신 6월 21일 왜적의 치욕적인 고문 끝에 한 많은 삶을 마치니 향년 43세셨다.
장군은 씨족과 국가를 위하여 살신명하니 장군의 옥중 혼은 천추에 불멸하고 공명은 의병사의 광야. 설송 장군의 장자는 영직이요. 자부는 김해김씨 명은지녀라. 장손은 한식이요. 손부는 경주최씨 성근지녀다. 차손은 창식이요 차손부는 전의이씨 종인지녀라. 증손자는 병대 성원 문범 현수야라.
서기 1994년 10월 11일
내외 묘재 서하 신평 안장등 병좌 임향야
밀양후인 박종현 근찬
서기 1994년 10월 11일
내외 묘재 서하 신평 안장등 병좌 임향야
밀양후인 박종현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