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용 기적비(충혼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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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혈곡리 276-1
탐방로그
함안군 가야읍 혈곡리 월성마을 입구에 3.1운동의사 김성용 기적비(충혼각)가 있다고 하여 찾아왔다. 원래 이 곳은 현충시설로 등록되어있었는데, 지금은 해지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방문해보니 애국지사의 추모시설이 등록 해지된 후부터 방치되고 있어 안타까웠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서기 1971년 3월 일
시인 동래 정진규 짓고 장수 이계표 쓰다.
자 창호 손 탁두 일두
이곳의 GPS상의 주소는 함안군 가야읍 혈곡리 276-1 이다.
함안군 가야읍 혈곡리 월성마을 입구 3.1운동의사 김성용 기적비를 찾아왔다.
원래 이곳은 현충시설에 등록되었다가 지금은 취소가 되었다고 한다.
첫번째 찾은 곳이 바로 김성용 선생의 기적비와 정려각이었다.
3.1운동 의사 김해김공 성용 기적비
'애국문'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비석 앞에는 '충혼각'이란 글이 눈에 띈다.
애국과 애족은 만고에 변함없는 민족의 정도이거늘 일찌기 이를 실행하여 후세의 거울이 되신 분이 이 고장에 계셨으니 이는 곧 김해 김성용(자 성안)공이시다. 공은 가락국
애국과 애족은 만고에 변함없는 민족의 정도이거늘 일찌기 이를 실행하여 후세의 거울이 되신 분이 이 고장에 계셨으니 이는 곧 김해 김성용(자 성안)공이시다. 공은 가락국
왕의 후손으로 1867년 12월 20일 본면 설곡리에서 태어나 재질과 용맹이 겸전하고 정의감이 강하여 1919년 3월 20일(음 2월 19일) 이 곳 함안에서 뜻을 같이한 안재영 조석규 안지호 의사와 더부러 기미독립만세시위에 앞장서 조국의 독립을 외쳤었다. 공은 이로 말미암아 마산감옥에서 2년 여의 옥고를 겪었으나 굳은 의지는 꺾기지 않았다. 1936년 5월 19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한많은 이 세상을 떠나셨으니 공의 기적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돌에 새기니 그 높고 곧은 뜻은 산천과 더부러 빛을 누리리라.
왕의 후손으로 1867년 12월 20일 본면 설곡리에서 태어나 재질과 용맹이 겸전하고 정의감이 강하여 1919년 3월 20일(음 2월 19일) 이 곳 함안에서 뜻을 같이한 안재영 조석규 안지호 의사와 더부러 기미독립만세시위에 앞장서 조국의 독립을 외쳤었다. 공은 이로 말미암아 마산감옥에서 2년 여의 옥고를 겪었으나 굳은 의지는 꺾기지 않았다. 1936년 5월 19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한많은 이 세상을 떠나셨으니 공의 기적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돌에 새기니 그 높고 곧은 뜻은 산천과 더부러 빛을 누리리라.
왕의 후손으로 1867년 12월 20일 본면 설곡리에서 태어나 재질과 용맹이 겸전하고 정의감이 강하여 1919년 3월 20일(음 2월 19일) 이 곳 함안에서 뜻을 같이한 안재영 조석규 안지호 의사와 더부러 기미독립만세시위에 앞장서 조국의 독립을 외쳤었다. 공은 이로 말미암아 마산감옥에서 2년 여의 옥고를 겪었으나 굳은 의지는 꺾기지 않았다. 1936년 5월 19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한많은 이 세상을 떠나셨으니 공의 기적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돌에 새기니 그 높고 곧은 뜻은 산천과 더부러 빛을 누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