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군위령탑

4

주소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산13-3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 산66-15(북방리 산 13-30) 고성산에 위치한 동학혁명군위령탑을 찾아가고 있다. 도로명은 <고성산동학로>이다.
하동 북방리 고성산성
하동 북방리 고성산성 (河東 北芳里 高城山城) - 경상남도 기념물 제142호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이 산성의 축조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후기까지 산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성산 8~9부 능선 곳곳에 자연적으로 암벽이 형성되어 있는데, 현재는 이 자연 암벽과 연결하여 축조한 옛 성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하동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일본의 내정 간섭과 국권 침탈이 본격화되자 이에 항거하여 봉기한 서부경남 농민군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1894년 전라도에서 농민군의 봉기가 시작되자, 같은 해 7월에 하동을 비롯한 서부 경남 농민들도 봉기에 나섰다. 농민군은 한때 진주성을 함락하기도 하였으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퇴각하여 이곳 고성산성을 중심으로 항거하였다. 10월 14일에 5천여 명으로 구성된 농민군은 이곳으로 출병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 186명이 전사하였다. 이 고성산성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서부 경남의 민중들이 부패한 정권과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였던 역사를 간직한 현장이다. 산 정상 부근에는 농민전쟁 당시 농민군 지휘자들이 회의를 개최할 때 사용한 의자 및 탁자의 잔해로 보이는 것들이 남아 있다.
東學革命軍 慰靈塔(동학혁명군 위령탑)
東學革命軍 慰靈塔(동학혁명군 위령탑)
위령탑 건립문
이곳은 민족의 얼이 깃든 곳이며 민족의 한이 서린 곳이다.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고자 총 궐기한 서부 경남지역 동학혁명군 수만명은 포덕 35년(갑오:1894) 11월 11일(음 10.14) 이 곳에서 왜군과 처절한 격전을 벌여 수많은 선열들께서 산화하신 곳이다.
동학혁명 100주년의 해를 맞이하여 순도순국선열들의 그 고귀한 뜻을 자손만대에 길이 전하고자 피로 얼룩진 이 능선에 전몰 선열들의 한맺힌 넋을 위로하며 그 격전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면서 후손과 후학들의 정성과 뜻을 모아 이 탑을 세운다.
포덕 135년 11월 11일 천도교 중앙총부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 심고
동학혁명군 위령탑 문(東學革命軍 慰靈塔 文)
저 멀리 소백산맥의 영봉(靈峯) 지리산이 솟아 있다. 북으로 남원 동으로 진주 남으로 사천 남해를 연접한 하동 옥종면 이 곳은 천연 오새 고수레당산(고성산)이다. 후천 개벽운에 따라 포덕 1년(1860) 경주 용담에서 천도교 제1세 교조 수운대신사(崔濟愚:최제우)꼐서 한울님으로부터 만고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아 시천주(侍天主) 신앙의 도를 펴시니 도탄에 빠진 창생은 삶의 광명을 찾아 풍운같이 모여 들었다. 조선조는 포덕 5년(1864) 대신사를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의 죄목으로 참형하는 등 동학도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자 포덕 12년(1871)부터 영해 공주 삼례 광화문 등에서 교조신원운동(伸寃運動)이 이어졌고 보은취회에서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운동을 벌였으나 조정은 이를 묵살하였음으로 드디어 포덕 35년(1894)에는 갑오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동년 3월 부안 백산기포를 선두로하여 5월에는 진주에서도 동학군이 봉기하여 백낙도(白樂道) 등이 순도하자 손은석(孫殷錫) 도중 등이 뒤이어 진주성을 점거하였다.
그 후 왜군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해월신사(崔時亨:최시형)의 명교에 따라 영.호 대접주(金仁培:김인배)의 지원으로 하동부를 점령하고 곤양 등 경남 서.남부 일대를 장악하였다. 11월 7일 안심리와 상평에서 동학군은 왜군과 교전하자 백곡 수곡 등지에 집결한 동학군의 주력은 왜군을 격퇴하기 위해 옥종면 북방리 앞들과 이곳 고성산으로 포진하였고 11월 11일(음 10월 14일) 아침에 동학군은 왜군만을 상대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그들의 신무기 앞에 희생되어 천추의 한을 남기고 말았다. 그후 여장협(余章協)이 이끄는 일부 동학군은 하동섬 진나루와 갈마치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으나 실패함으로써 이 고장 경남 서.남부지역에서도 수많은 동학군이 순도하였으며 전국에서 300만이 동원되어 30만명이 희생당하였다. 비록 왜군의 침략으로 혁명군의 항전은 멈추었으나 반침략 민족자주와 자립을 위한 동학혁명 정신은 기미 3.1독립운동 정신으로 승화되어 8.15광복을 맞게 된 것이다. 앞으로 민족통일의 대업도 이 숭고한 동학혁명정신 선양에서만이 이루어 질 것으로 확신한다. 우리 후학들은 순도순국하신 영령들께 진혼의 치성을 올리고 아울러 유족들에게는 위로를 드리며 앞으로 우리 천도교의 오만년 대운이 더욱 융창할 것을 심고드리면서 이 탑을 세운다.
글 지은이 정암 고정훈 포덕 135년(1994년) 11월 11일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 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