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묵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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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산114-2
탐방로그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1141-3 지소마을 입구에 위치한 애국지사 박영묵 선생 묘소 안내판을 찾았다. 애국지사 밀양박공 휘 영묵, 배 유인 김해김씨 지묘. 애국지사 내외의 묘가 조성되어 있고, 곁에는 박영묵 지사를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3.1독립운동 행적록
순열의 선민은 유국의 정간이시다. 1일의 피로 인하여 민족의 소생함을 昭蘇(소소)함을 보게 됨이 어찌 徒言(도언)이리까. 국조개기이래 면연 5천년 처음으로 이민족의 箝除(겸제)를 당하여 나라와 겨레의 기치대욕의 극함이 십유년 기미3월에 총일의 표로가 독립만세로 퍼져 의기 곳곳에 날리고 裏革(리혁)의 尸(시)와 冷山(냉산)의 혼이 의성으로 내외를 흔들매 우리고장 고전성천에 낳신 밀양후인 박영묵공께서는 평소 담아오신 우국애정으로 사재를 쾌척하셔 동
3.1독립운동 행적록
순열의 선민은 유국의 정간이시다. 1일의 피로 인하여 민족의 소생함을 昭蘇(소소)함을 보게 됨이 어찌 徒言(도언)이리까. 국조개기이래 면연 5천년 처음으로 이민족의 箝除(겸제)를 당하여 나라와 겨레의 기치대욕의 극함이 십유년 기미3월에 총일의 표로가 독립만세로 퍼져 의기 곳곳에 날리고 裏革(리혁)의 尸(시)와 冷山(냉산)의 혼이 의성으로 내외를 흔들매 우리고장 고전성천에 낳신 밀양후인 박영묵공께서는 평소 담아오신 우국애정으로 사재를 쾌척하셔 동
지를 규합 33인으로 일신단을 조직 죽기를 맹세하고 선교시장에서 수천군중과 더불어 의거를 지도하시고 인류정의와 민족자결의 대의를 외치니 시위의 대열이 도도하여 왜인의 간담을 찌르다. 당황한 왜헌의 발악적 제지 출동로 혈풍평우가 휩쓰렀으니 고선민 임전무퇴의 계 재흥함을 이를지라. 역부족 세불급함에 중중을 뒷산에 피신케 한 연후 스스로 왜헌의 총구앞에 나서 주모책임자임을 천명하고 피포되어 극형 언도를 받았으나 6년으로 감형 대구감옥에서 복영중 소위 왜국경으로 2년 6개월에 출옥하셨다. 출옥후 왜경의 가진 협박과 회유에도 추호의 굴함도 없어 가이 대호라 하셨다. 신명을 바쳐 염원하시던 조국이 광복됨에 전공을 낮추고 명리를 탐함이 없이 초부로 자적하시며 오직 조국의 통일과 번역에 여일하시던 중 서기 1968년 무신 12월 19일 향년 89세로 순절하시니 어찌 의인의 고종이라 아니하리오. 공은 고려조 태사관 휘 언부 瑥(온)이 현조요 은산부원군 영균의 17세손시고 공의 휘는 영묵 자는 지암 호는 대호 이시며 자는 대ㅠ 상홍이다. 천시 우신하여 일도찬연한 국광을 일으켜 이 민중으로 하여금 치욕의 일에 矜負(긍부)와 비참의 기에 분발을 가지게 한 공의 사실 표적이 없어 안타깝더니 독립유공자포상으로 묘표를 세워 공의 애국의기를 추
지를 규합 33인으로 일신단을 조직 죽기를 맹세하고 선교시장에서 수천군중과 더불어 의거를 지도하시고 인류정의와 민족자결의 대의를 외치니 시위의 대열이 도도하여 왜인의 간담을 찌르다. 당황한 왜헌의 발악적 제지 출동로 혈풍평우가 휩쓰렀으니 고선민 임전무퇴의 계 재흥함을 이를지라. 역부족 세불급함에 중중을 뒷산에 피신케 한 연후 스스로 왜헌의 총구앞에 나서 주모책임자임을 천명하고 피포되어 극형 언도를 받았으나 6년으로 감형 대구감옥에서 복영중 소위 왜국경으로 2년 6개월에 출옥하셨다. 출옥후 왜경의 가진 협박과 회유에도 추호의 굴함도 없어 가이 대호라 하셨다. 신명을 바쳐 염원하시던 조국이 광복됨에 전공을 낮추고 명리를 탐함이 없이 초부로 자적하시며 오직 조국의 통일과 번역에 여일하시던 중 서기 1968년 무신 12월 19일 향년 89세로 순절하시니 어찌 의인의 고종이라 아니하리오. 공은 고려조 태사관 휘 언부 瑥(온)이 현조요 은산부원군 영균의 17세손시고 공의 휘는 영묵 자는 지암 호는 대호 이시며 자는 대ㅠ 상홍이다. 천시 우신하여 일도찬연한 국광을 일으켜 이 민중으로 하여금 치욕의 일에 矜負(긍부)와 비참의 기에 분발을 가지게 한 공의 사실 표적이 없어 안타깝더니 독립유공자포상으로 묘표를 세워 공의 애국의기를 추
인하니 오호라 生無百歲死千秋(생무백세사천추)이로다.
서기 1983년 4월 6일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산114-2
애국지사 박영묵선생의 묘
일산단을 조직하여 목숨바쳐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키로 결의하고 1919년 4월 6일 고전장날을 거사일로 정하였음.당일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눠주고 단상에 올라가 연설을 마친후 독립만세를 선창하는등 군중을 지휘하시다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주동자로 자처 2년6월의 옥고를 치르셨다.
묘소로 올라가는 계단옆에 묘소 안내표지석이 서 있었다.
기미년3.1독립투사 박공 영묵지묘
애국지사 밀양박공 휘 영묵, 배 유인 김해김씨 지묘
愛國志士密陽朴公諱永黙之碑(애국지사 밀양박공 휘 영묵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