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기념관

4

주소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841
탐방로그
기념관 내부에는 주기철 목사의 흉상이 건립되어 있고, 선생의 연보와 사진 등과 함께 국가보훈처에서 선생에게 봉정한 이 달의 독립운동가 패 등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소양의 애국계몽운동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뒤 지병인 안질로 인해 낙향하여 건강을 돌보면서 웅천교회에 출석하여 총각 집사로 임명받아 교회를 섬겼다. 주기철은 1917년 10월, 20세의 나이로 이기선 목사의 소개로 김해읍 교회에 출석하던 안갑수와 중매로 결혼하였다. 집안이 안정되고 병세가 호전된 주기철은 지역 민족운동가인 오상근과 함께 "웅천 청년 운동단"이란 단체를 만들어 시국강연회와 계몽활동을 하면서 민족계몽운동단체인 "교남학회"를 조직하고 그지역 청소년들을 상대로 계몽운동과 강연을 실시하였다.
주기철은 민족 계몽운동을 할 즈음 일제는 한국을 영구 식민지화하기 위해 화투·아편·창녀를 보급했다. 이러한 시도는 설움과 울분을 삭이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애국애족의 대열에 서서 일제를 향한 항일운동에 나서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젊은이들의 정기를 흐려놓고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으려 한 술책이었다. 이에 격분한 청년 주기철은 오산학교에서 배운 민족애를 바탕으로 일제의 이러한 만행에 울분을 삭이지 못하는 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새기는 그 忠節(충절)
이달의 獨立運動家(독립운동가)
建國勳章 獨立章 朱基徹 先生(건국훈장 독립장 주기철 선생)
國權(국권)을 守護(수호)하고 祖國(조국)의 光復(광복)을 위해 身命(신명)을 바치신 先生(선생)의 崇高(숭고)한 獨立精神(독립정신)을 繼承(계승)하고 그 뜻을 기리고자 이 牌(패)를 奉呈(봉정)합니다.
2007. 11. 23.
國家報勳處長 金井復(국가보훈처장 김정복)
오재길 - 유기농법 창시자(월드비전 전 대표 오재식 장로의 형) / 방계성 장로(1926년 1월 10일 초량교회에서 장로장립) /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와 방계성 장로, 오재길 선생(1937년)
훗날, 방계성 장로는 목사가 되어 6·25때 순교의 길을 가게 되고, 오재길은 방계성 장로의 사위가 된다. 특히, 오재길은 국내 최초의 유기농법 창시자가 되며, 그의 동생은 전 월드비전 대표인 오재식 장로다.
주기철 목사 연보
● 경남 웅천(熊川)에서 태어남
● 경남 웅천의 개통학교 졸업
●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
●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으나 병으로 1년 만에 중퇴
● 웅천으로 귀향함. 교회활동을 열심히 하여 웅천교회의 집사로 추천됨
●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교회활동을 하고 가끔 '술 취한 상태로 '강단에서 설교'하던 그는 1920년 9월에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깨닫고 다시 거듭남
● 학회를 조직. 3.1운동에 참가
● 1925년 평양신학교_현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함
● 부산 초량교회, 마산문창교회를 거쳐 1936년 은사 조만식으로부터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 요청받음
●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초빙목사로 부임함
● 자기희생을 통한 신앙실천을 강조하는 일사각오(一死覺悟) 설교로 기독교 신앙실천과 배일사상(排日思想), 그리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함.
● 1938년 2월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하다가 1차 검속(檢束)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6월 풀려남
● 1938년 8월 제2차 검속에 체포되었다가 1939년 1월 풀려남
● 1939년 10월 제3차 검속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남
● 1939년 12월 19일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는 신사참배 결의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기철 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
● 1940년 2월 산정현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주제로 마지막 설교를 하다
● 1940년 9월 제4차 검속으로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일시에 검거할 때 함께 체포됨
● 1944년 복역 중 고문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순교
● 1963년 대한민국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2006년 4월 18일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평양노회에서 주기철의 목사직 파면을 취소
(좌)경남노회 종교교육지도자 하기수양회 기념사진
1930년 8월 23일 동래일신학교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으로 주기철 목사 왼쪽 두 번째에 있는 이약신 목사(중앙)는 주기철 목사와 오산중학교 동창이다. 후에 주 목사의 추천으로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에서 주 목사의 뒤를 이어 목회하게 되며, 주 목사와는 의형제를 맺은 친구이기도 하다.
(하)주기철 목사의 장례식 모습
1944년 4월 21일(금) 오후 4시, 오정모 사모와의 마지막 면회를 한 후, 당일 저녁 9시, 평양 형무소에서 주기철 목사는 순교한다. 중앙에 어린 막내 광조를 중심으로 왼쪽에 오정모 사모, 오른쪽에 셋째 영해와 장남 영진이 상주로 서 있다. 당시 일본에 피신 중이던 둘째 영만은 소식을 늦게 접하고 오지 못해 장례식에 참석조차 못했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841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기념관을 찾았다.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기념관
주기철(朱基徹)
1897.11.25~1944.4.21
주기철 목사 흉상
기독교와 독립운동
한국의 민족운동 내지 독립운동은 기독교와 불가분리의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보면 그 지도인물의 절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다. 1914년의 국민회사건 등은 기독교가 3·1운동 이전에 가졌던 민족운동 내지 독립운동이었다. 국내외에 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대규모적으로 일어났던 3.1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3·1독립운동은 종파와 계급을 초월한 거족적 독립운동이었지만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의 종교적 분포가 기독교인 16명, 천도교인 15명, 불교인 2명으로 되어있는 것은 3·1운동의 주도권이 기독교 측에 있었음을 시사해 주거니와, 3·1운동의 시위만세 역시 언제 어디서나 교회가 중심이 되었다.
또한 3.1운동에서 입은 참화와 피해도 교회가 가장 컸다. 수원 제암리교회의 집단학살사건을 비롯해서 강서의 사천교회, 정주교회, 강계교회, 위원교회, 북간도 노루바위교회, 서간도의 여러 교회 학살사건 등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상 영원히 잊지 못할 가장 가혹하고 처참한 박해였다. 3·1운동으로 말미암은 교회의 피해 상황을 보면 3월 1일부터 5월 30일 사이에 파손된 교회는 47곳이었고, 1920년 3월 1일까지의 피해 상황을 보면 57개의 교회가 불에 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