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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8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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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정 배중세지사 순국기념비는 경남 창원시 성산구 상남공원 내에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경남 창원시 성산구 상남공원 내 단정 배중세지사 순국기념비를 찾아왔다.
단정 배중세지사 순국기념비
단정 배중세 지사는 1895년 12월 18일, 옛 창원군 상남면 토월리에서 태어났다. 소년시절부터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던 배지사는 민족 계몽교육과 항일사상 고취에 앞장섰으며, 3.1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서다 왜경의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배중세 지사는 동지들과 의혈단을 조직하여 경찰서 및 관공서 폭파와 요인 암살 거사를 추진하나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혹독한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1944년 1월 23일 향년 49세로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지사는 청년의 꿈을 오직 조국 광복에 두고 하나뿐인 생명을 독립운동 제단에 바치고 광복 운동사에 찬란히 빛나는 거룩한 업적을 남긴 의혈단 창단 핵심단원으로 순국 그날까지 그 분의 강경과 기개를 지킨 의와 열과 충의 화신이었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단정 배중세 애국지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을, 1977년에 건국 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단정 배중세 지사는 1895년 12월 18일, 옛 창원군 상남면 토월리에서 태어났다. 소년시절부터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던 배지사는 민족 계몽교육과 항일사상 고취에 앞장섰으며, 3.1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서다 왜경의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배중세 지사는 동지들과 의혈단을 조직하여 경찰서 및 관공서 폭파와 요인 암살 거사를 추진하나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혹독한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1944년 1월 23일 향년 49세로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지사는 청년의 꿈을 오직 조국 광복에 두고 하나뿐인 생명을 독립운동 제단에 바치고 광복 운동사에 찬란히 빛나는 거룩한 업적을 남긴 의혈단 창단 핵심단원으로 순국 그날까지 그 분의 강경과 기개를 지킨 의와 열과 충의 화신이었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단정 배중세 애국지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을, 1977년에 건국 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丹丁裵重世志士殉國紀念碑(단정 배중세지사 순국기념비)
단정(丹丁) 배중세 지사는 1895년 12월 18일 창원군 상남면 토월리에서 태어나 1944년 1월 23일 49세의 나이로 순국하신 우리 지역의 대표적 애국자이시다. 소년시절부터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으며 항일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독립사상과 계몽운동을 전개 민족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24세가 되던 기미(己未)년 3.1만세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지자 이곳 상남장날을 기하여 만세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신 것을 비롯 군자금 제공 의열단 조직 창단 일본 요인 암살 및 일제 수탈 기구 파괴 공작 등 평생을 항일독립운동에 몸바쳐 왔으며 6년에 걸친 세차례의 감옥생활에도 잔인한 고문에 굴하지 않고 오로지 꿋꿋한 선비정신과 당당한 기백으로 일경과 맞서 싸우다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옥사하였다.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의 위난에 처했을때 분연히 일어나 구국의 투혼을 불태우시고 민족의 정기를 올곧게 세우신 님의 일편단심 조국을 지키려는 높고 푸른 웅지(雄志)야 말로 오늘에 사는 우리 모두의 애국의 표상(表象)이며 초석(礎石)인 동시에 창원의 긍지요 자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우리는 대한민국 광복사에 찬연히 빛나는 지사의 숭고한 항일독립사상을 영원히 기리고 자손만대에 그 거룩한 애국애족 정신을 선양(宣揚)케 하여 나라사랑의 귀감이 되게 함으로써우리 고장의 번영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고자 일찍이 님께서 민족의 얼을 고취하신 이 곳에 50만 창원 시민의 뜻을 모아 단정 배중세 지사 순국기념비를 세운다.
단정 배중세 지사 연보 - 조선고종 32년(1895년)을미(乙未) 12월 18일 경남 창원군 상남면 토월리에서 부친 분성 배씨 기홍(基洪)과 모친 반남 박씨 시절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15세(1910년)에 김해 김(金)씨 진사 달근(達根)의 따님 봉연(奉連)과 혼인하다.
1916년 : 소년시절부터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던 배지사(裵志士)는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결심 독립사상고취와 계몽운동을 전개 민족 교육사업에 투신하다.
1919년 3월 ~ 4월 : 상남면과 진전면에서 독립만세 운동의 선봉장으로 활약하다.
1919년 5월 : 조국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중국으로 망명하다.
1919년 11월 :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 화성 여관에서 12명 동지와 함께 무력에 의한 항일 독립투쟁을 결의하고 조선독립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다.
1920년 3월 : 중국과 일본은 물론 국내의 일제주요시설 기관을 폭파하고 일제 요인과 주구(走拘)들을 처단함을 활동목표로 삼은 의열단의 결의에 따라 거사에 사용할 폭탄 및 무기를 국내에 반입 및 은닉의 책임을 맡고 활약하다.
1920년 5월 : 거사에 사용할 대량의 폭탄과 무기 및 실탄을 삼엄한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마산역전.밀양.김해진영.창원동읍 무점리에 각각 운반 은닉에 성공하다.
1920년 8월 : 의열단에 의한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총독부기관지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사.밀양.부산경찰서 폭파계획이 거사 직전에 일본경찰에 탐지되어 체포 수감되다.
1921년 6월 : 수감 후 혹독한 고문과 악형 끝에 경상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다.
1923년 5월 : 2년 9개월(1920년 8월 수감 ~ 1923년 5월 석방까지)간의 옥고를 치루고 석방되다.
1916년 : 소년시절부터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던 배지사(裵志士)는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결심 독립사상고취와 계몽운동을 전개 민족 교육사업에 투신하다.
1919년 3월 ~ 4월 : 상남면과 진전면에서 독립만세 운동의 선봉장으로 활약하다.
1919년 5월 : 조국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중국으로 망명하다.
1919년 11월 :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 화성 여관에서 12명 동지와 함께 무력에 의한 항일 독립투쟁을 결의하고 조선독립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다.
1920년 3월 : 중국과 일본은 물론 국내의 일제주요시설 기관을 폭파하고 일제 요인과 주구(走拘)들을 처단함을 활동목표로 삼은 의열단의 결의에 따라 거사에 사용할 폭탄 및 무기를 국내에 반입 및 은닉의 책임을 맡고 활약하다.
1920년 5월 : 거사에 사용할 대량의 폭탄과 무기 및 실탄을 삼엄한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마산역전.밀양.김해진영.창원동읍 무점리에 각각 운반 은닉에 성공하다.
1920년 8월 : 의열단에 의한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총독부기관지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사.밀양.부산경찰서 폭파계획이 거사 직전에 일본경찰에 탐지되어 체포 수감되다.
1921년 6월 : 수감 후 혹독한 고문과 악형 끝에 경상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다.
1923년 5월 : 2년 9개월(1920년 8월 수감 ~ 1923년 5월 석방까지)간의 옥고를 치루고 석방되다.
1925년 10월 : 출옥 후 다시 중국(북경.상해 등)을 무대로 의열단의 새로운 의거활동을 전개. 활동에 필요한 자금조달에 착수. 경북 달성과 포항.경남 하동 등지에서 활동 중 1925년 10월 15일 자금 수령 장소인 경북 달성에서 경북 경찰부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다.
1927년 12월 : 징역 3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두번째 형극의 옥고를 치루고 석방되다.
1943년 1월 : 두번이나 옥고를 치룬 후 극도로 쇠약해진 몸으로 계속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던 중 태평양 전쟁의 혼란한 시기를 틈타 일제 요인 암살과 관청 폭파 임무를 띄고 거사를 추진 중 다시 체포되어 영어의 몸이 되다.
1944년 1월 : 대구 형무소에 수감된 단정 배중세 지사는 갖은 고초와 악형의 심문에도 끝내 거사 내용을 밝히지 않고 수차례 혼절 끝에 가사 상태에서 급거 도립 포항병원으로 이송. 일제 헌병의 삼엄한 경비와 감시하에 치료 중 이듬해 그토록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1월 23일 향년 49세의 아까운 나이로 옥중 순국하다.
단정 배중세 지사는 1919년 5월 청년의 꿈을 오직 조국광복에 두고 중국으로 망명. 하나뿐인 생명을 도긻운동의 성스러운 재단에 바치고 일신을 초개같이 버리면서 과감하고 처절한 무력투쟁으로 피의 항쟁을 선택하고 뜻을 함께 한 동지들과,「정의(正義)의 사(事)를 맹열히 실행한다」고 결의. 일제(日帝)의 간담을 서늘케 한 공포의 대상이였으며 광복운동사에 찬연히 빛나는 거룩한 업적을 남긴「義烈團(의열단)」창단의 핵심단원을 순국의 그날까지 「의열단」결사의 강령과 기개를 끝까지 지킨 義(의)와 烈(열)과 忠(충)의 귀감이였으며 자랑스런 義烈團(의열단)의 화신이였다.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단정 배중세 애국지사의 공훈을 기리거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을 1977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27년 12월 : 징역 3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두번째 형극의 옥고를 치루고 석방되다.
1943년 1월 : 두번이나 옥고를 치룬 후 극도로 쇠약해진 몸으로 계속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던 중 태평양 전쟁의 혼란한 시기를 틈타 일제 요인 암살과 관청 폭파 임무를 띄고 거사를 추진 중 다시 체포되어 영어의 몸이 되다.
1944년 1월 : 대구 형무소에 수감된 단정 배중세 지사는 갖은 고초와 악형의 심문에도 끝내 거사 내용을 밝히지 않고 수차례 혼절 끝에 가사 상태에서 급거 도립 포항병원으로 이송. 일제 헌병의 삼엄한 경비와 감시하에 치료 중 이듬해 그토록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1월 23일 향년 49세의 아까운 나이로 옥중 순국하다.
단정 배중세 지사는 1919년 5월 청년의 꿈을 오직 조국광복에 두고 중국으로 망명. 하나뿐인 생명을 도긻운동의 성스러운 재단에 바치고 일신을 초개같이 버리면서 과감하고 처절한 무력투쟁으로 피의 항쟁을 선택하고 뜻을 함께 한 동지들과,「정의(正義)의 사(事)를 맹열히 실행한다」고 결의. 일제(日帝)의 간담을 서늘케 한 공포의 대상이였으며 광복운동사에 찬연히 빛나는 거룩한 업적을 남긴「義烈團(의열단)」창단의 핵심단원을 순국의 그날까지 「의열단」결사의 강령과 기개를 끝까지 지킨 義(의)와 烈(열)과 忠(충)의 귀감이였으며 자랑스런 義烈團(의열단)의 화신이였다.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단정 배중세 애국지사의 공훈을 기리거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을 1977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