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도석 기념비

4

주소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 산50-2
탐방로그
경남 마산시 회원구 봉암동 88 오륜화단 내에 있다는 허당 명도석선생 기념비를 찾았지만, 보훈처의 주소가 잘못되어 있었다. 허당 명도석선생 기념비는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 산50-2 서광아파트 옆 오륜화단에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허당 명도석선생의 후손과 연락이 되어 관련 사적지의 약도를 보내주셨다.
경남 마산시 회원구 봉암동 88 오륜화단 내에 있다는 허당 명도석선생 기념비를 찾았지만, 보훈처의 주소가 잘못되어 있었다.
산50-2 서광아파트 옆 오륜화단이 맞는 주소이다. 보내주신 약도가 매우 주효했다.

허당은 빈집이라는 뜻으로 나라 잃은 백성은 빈집과 같다는 의미로 선생 스스로 지으셨다고 한다.
애국지사 허당 명도석 선생 기념비
허당 명도석 선생 기념비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 관리번호 : 42-1-35 / 관리자 : 마산시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 민족자본 육성과 독립운동 자금제공, 의열단 경남조직 주재, 경남지역 신간회 결성 등의 활동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던 허당명도석 선생을 추모하여 2005년 8월 15일 건립하였음.
애국지사 허당 명도석 선생 기념비
허당 - 그 불명의 애국혼
"뜻을 행하되 드러내지 말 것이며 공을 세웠으되 명예를 생각하지 않는다." 는 신념으로 올곧게 살아오신 허당 명도석 선생은 일생을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일념을 안고 반외세(反外勢) 투쟁의 중심에서 온몸을 바친 우리의 영원한 애국자이시다.
일찍이 선생은 일제의 광포한 침탈(侵奪)에 분연히 맞서 민족자본으로 마산의 상권(商權)을 끝내 수호(守護)하였으며, 국내 최초의 노동야학학교(勞動夜學校)를 설립, 무산대중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준 위대한 선각자(先覺者)이시기도 하시다. 저 유명한 기미독립 만세시위(萬歲示威)를 주도하셨고 원동(元東)상회를 설립, 일제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독립군과 상해임시정부(臨政)에 자금(資金)을 제공하는데 영일(寧日)이 없으셨으며 거사모의사건에 연루돼 모진 옥고(獄苦)를 겪으셨는가 하면 저들의 간담을 서늘케한 의열단(義烈團)에 적극 관여하는 등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은
조국광복(祖國光復)을 위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발로(發露)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해방과 함께 건준(建準) 경남조직책을 맡아 민족통합을 위해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좌·우합작(左·右合作)의 선봉에 서서 분골쇄신(粉骨碎身)해오신 이 땅의 거목이기에 흠모의 정을 금치 못한다.
이제 합포만을 굽어보는 반룡산(盤龍山) 자락에 선생의 애국혼이 서린 이 빗돌을 우뚝 세우나니 굽힙없는 시퍼런 기개 하늘을 찌르고 꺽이지 않았던 열혈단심(熱血丹心)은 온누리에 살아 숨쉬는데 우리 모두 그 영예 그 위업을 높이 받들어 연년세세(年年歲歲) 빛나도록 하리라.
단기 4338년(2005년) 8월 홍중조 삼가 지어 바치다.
허당 명도석 지사 연보(독립운동가, 사업가, 교육자, 언론인)
조선 고종 22년(1885년) 을유(乙酉) 4월 3일 마산시 중성동에서 부친 연안명씨 응찬씨와 모친 경주이씨 묘악씨의 차남으로 출생 기계유씨 해붕씨의 따님 국희씨와 혼인하다.
-.1902년 : 일제(日帝)의 마산포(馬山浦) 구강장(舊江場) 상권 쟁취 기도(企圖)에 분연히 맞서 상권수호(商權守護) 투쟁에 적극 참여함.
-.1907년 : 옥기환, 구성전과 전국에서 처음으로 마산노동야학교(馬山勞動夜學校)를 설립, 무산가정의 자녀에게 신교육(新敎育)을 하면서 민족의식(民族意識)을 고취.
-.1919년 : 기미(己未) 항쟁 당시 김관재, 김용환, 이형재, 박순천 동지 등과 만세(萬歲) 시위를 주도.
: 조선인에 의한 마산의 첫 회사인 원동(元東) 무역 주식회사를 설립, 운영 중 친일파가 독립운동자금을 보낸다고 밀고하여 회사를 탈취 당함.
: 의열단(義烈團) 창립에 깊이 관여하고 경남거점(慶南據點) 조직을 주재, 갑종요시찰인(甲種要視察人)으로 수십차례 구금당함.
-.1920년 : 밀양(密陽) 폭탄 사건의 거사를 주도.
-.1921년 : 동아일보 창간 당시의 민족계도(民族啓導) 창립 정신에 호응하여 주주가 되었으며, 민족계도 사업에 동참
-.1922년 : 마산의 청년우국(青年憂國) 단체인 마산구락부를 주도.
-.1923년 : 조만식, 명제세 등이 주도 하던 조선물산 장려운동, 일제의 상권 침투저지(商權浸透阻止) 운동에 동참.
-.1927년 : 신간회(新幹會) 발족 당시 마산 지회를 결성, 마산지회장을 맡아 1931년 일제의 강제 해산령이 내릴 때까지 활동.
-.1928년 :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박용만 동지와 만주에서, 미국에서 백박사를 만나 거사(擧事) 자금 전달과 거사를 1992년 모의하던 중 안동에서 피검거되어 평양감옥에서 옥고(獄苦)를 치름.
-.1932년 : 일제의 방해로 양조장 사업을 운수업으로 전환, 사업으로 번 재물을 백산 안희제, 의령의 남저 이우식 등 동지들과 연합하여 1944년 독립운동 자금을 국내외로 전달하는 자금제공처(資金提供處) 역할을 함.
-.1944년 : 여운형씨가 주도하던 조선건국동맹의 경남조직을 담당하고 책임자로서 활동.
-.1945년 :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建準) 마산지회장에 추대되었으나 좌·우(左·右) 정치싸움과 민족통합의 좌절에 실망하여 정치에서 물러나 우국지염(憂國之念)으로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다 1954년 6월 9일 서거함.
-.1990년 : 대한민국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함.